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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르틴 루터의 동역자들
이름: 배진기 * http://phac.or.kr


등록일: 2019-11-06 16:21
조회수: 20



마르틴 루터의 동역자들



1. 카타리나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 1499-1522)









카타리나 폰 보라는 작센 선제후 령의 작은 도시 리펜도르프(Lippendorf)의 몰락한 귀족가문에서 1499년 1월 29일 출생하였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귀족집안의 자녀들이 수도원에 의탁되는 관행에 의해 카타리나는 여섯 살 때 가족을 떠나 브레나의 베네딕토수녀원학교(Klosterschule der Benediktinennen in Brehna)에 보내져 그곳에서 기초적인 읽기, 쓰기와 산수를 배웠다. 열 살이 되던 1509년 님프쉔의 시토회 성모대관 수녀원(Zisterzienserinnenkloster Marienthron in Nimbschen bei Grimma)에서 수련수녀 생활을 시작하면서 라틴어와 음악을 공부하였고 수도원의 자급자족 경제를 위한 농업과 목축업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였다. 1515년 종신서약 후 본격적인 수도자(Nonne)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그로부터 이 년 후 루터의 종교개혁 소식을 접한다. 1523년 부활절 전날 토르가우 시의원 레온하르트 쾨페의 도움으로 8명의 동료 수녀들과 수녀원을 탈출해 토르가우를 경유해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였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수녀들은 비텐베르크 유지들의 가정에 분산해서 생활하였는데 카타리나는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 Ä)의 집에 기거하였다. 이 년 후인 1525년 6월 13일 그녀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혼인하였으며 이후 선제후 요한 불변공(Kurfürst Johann der Beständige)의 배려로 검은 수도원(아우구스티너수도원)에서 거주하게 된다.
그녀는 마르틴 루터의 아내로 여섯 자녀의 부양은 물론 10여 명의 하숙생과 남편의 비텐베르크 동료들 그리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인해 많을 때는 40여 명 식객의 가계(家計)를 운영하며 루터를 내조하였다. 카타리나는 일꾼들과 함께 중세인의 주업이던 농사와 목축은 물론 어류양식, 맥주양주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경제활동을 운용해 예전에 검은 수도원(SchwarzesKloster)으로 불렸던 저택의 살림살이를 경영하였다. 저택 안주인의 역할만이 아니라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 알려진 것처럼 남편 루터의 신앙의 동지, 개혁운동의 동반자였음은 물론이다. 그런 아내를 루터는 ‘나의 주인 캐테’(mein Herr Käthe)라고 부르며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였고, 역사가들은 카타리나의 아내와 주부의 역할을 넘어선 종교개혁 동역자의 역할을 기려 그녀에게 ‘여성루터’(Lutherin)라는 존칭을 부여해왔다.
루터가 죽은 후 경제적으로 힘겹게 생활하던 53세의 그녀가 페스트를 피해 자녀들과 토르가우로 이주해왔다가 마차사고로 1552년 12월 20일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토르가우 성 마리엔교회(St. Marienkirche)에 매장되었으며 숨을 거둔 장소는 현재까지 보존되어 ‘카타리나 루터 기념관’(Katharina-Luther-Stube in Torgau)으로 사용되고 있다.


2. 프리드리히 3세 폰 작센 선제후 (1463-1525)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Friedrich der Weise von Sachsen, 1463년 1월 17일 ~ 1525년 5월 25일)는 작센 선제후 (재위 1486년 ~ 1525년)이다. 현명하기로 이름이 나 '현공'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교양이 풍부하고 음악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비텐베르크를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신성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1502년 비텐베르크 대학교 (로이 꼬레아)를 세웠다. 그는 열렬한 구교도였지만 마르틴 루터를 보호하고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주고 종교 개혁을 도와, 그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진전되었다.

3. 요한 폰 스타우피츠 (1460-1524년 경)







에어 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원장으로 젊은 수도사 마틴 루터의 매우 영향력 있는 멘토였다. 루터에게 성경을 마음대로 접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주고 (당시는 사제들도 위에서 허락하는 성경만 읽을 수 있었다) 죄의 문제로 번민하는 루터의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나중에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세우고 교수로 초빙 되자 마르틴 루터를 데리고 가서 루터의 배경이 되어주었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뒤에서 도운 스승이었다. 그는 전면에 나서서 카톨릭 교회를 향해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루터의 생각에 동의하였으며 루터가 고민하는 문제들을 잘 상담하고 지도해준 루터의 동역자 역할을 하였다.

4.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1485-1558)




  


요하네스 부겐하겐은 마르틴 루터가 독일 북부지역 포메라니아 박사로 부른 인물이다. 그는 포메라니아 지역과 덴마크 지역에 종교 개혁을 소개하였다. 그의 주된 공헌은 북부 독일 지역과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루터란 교회를 조직한 것이다.  그는 북부의 두 번째 사도로 불렸다.
요하네스 부겐하겐은  비텐베르크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마르틴 루터의 목사였다. 그는 1485년에 폴린이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1502년에 그립스발트에서 인문주의를 연구했고, 1509년에 신부와 성서교사로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521년에 출판된 루터의 저작 <<교회의 바벨론 유수>>라는 책을 비판하였지만 후에 루터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개인적인 고해신부로서 영적 조언자 역할을 하였고, 1525년에 루터가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할 때에는 주례자라 였으며 루터의 장례식을 집례하였다

5. 슈팔라틴 (Georg Spalatin , 1484년~1545년)







인문주의자로서 마르틴 루터의 친구였고 외교력을 발휘하여 초기 단계의 종교개혁을 진전시키고 안정시키는 데 한몫 했다. 학생시절 여러 인문주의자들과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관행에 따라 이름에다 출생지를 나타내는 성(姓)을 붙였다.
1505년 독일 학자 무티아누스 루푸스가 이끄는 인문주의자 모임에 가입했고, 같은 해 게오르겐탈에 있는 수도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508년 사제 서품을 받고, 작센의 선제후 현명공 프리드리히 3세의 후계자를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3세의 조카들을 맡아 가르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루터를 처음 만났다. 이듬해 프리드리히의 사서로 임명되었으며, 이 일을 하면서 점차 프리드리히의 궁정에서 신망을 얻게 되었다.
루터에 대한 존경심을 프리드리히에게 전해, 1518년 사면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선제후로 하여금 루터를 보호하도록 설득했다. 이 일은 종교개혁의 진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슈팔라틴은 또한 루터가 보름스 종교회의(1521)에서 호의적인 대접을 받도록 도왔으며 이로 인해 루터의 적대자들이 그를 단죄하고자 했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마찬가지로 그는 작센의 두 선제후 요하네스와 요하네스 프리드리히의 재위기간에 연달아 소집된 종교회의에서 계속 종교개혁을 옹호했다.
1526년부터는 각 교회와 학교를 방문하는 데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작센에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1530년부터 루터의 동료인 필립 멜란히톤과 함께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합법적으로 정착시킨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을 준비하고, 1531년 독일 제후들간의 슈말칼덴 동맹을 조직했다. 또한 프리드리히를 위해 루터와 멜란히톤의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다.


6.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년~1553년)







요하네루카스 크라나흐는 프랑켄 지방의 크로나흐에서 태어난 루터 시대의 독일의 화가이다. 1505년 비텐베르크에 이사한 그는 커다란 아틀리에를 차리고, 우미한 여성의 나체상과 신화화(神話畵)를 많이 그렸으며, 루터나 기타 저명인사의 초상화에도 걸작이 많고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반영하는 루터란의 가르침 즉 율법과 복음에 대한 신학적 주제를 보여주는 그림도 많이 그렸다. 1537~1544년에 걸쳐 그곳 시장(市長)을 지냈던 그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열렬하게 지지하기도 하였고, 만년에 가서는 바이마르의 궁정화가로 지내다가 1553년 거기에서 운명하였다. 또 이름이 같은 그의 아들(1515~1586)도 화가로서 부친의 조수·후계자가 되어 활약하였으며 루터를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7.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 1497-1560)







필립 멜랑히톤은 1497년 2월 16일 브레텐에서 태어났다. 멜랑히톤의 본명은 독일식 이름 필립 슈바르츠에르트(Philipp Schwartzerdt)다. 슈바르츠에르트는 검은 땅을 뜻한다. 이 이름을 희랍어로 바꾼 것이 멜랑히톤이다. 멜랑히톤은 천재였다. 그는 1509년 12세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해 2년 뒤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바로 2년 뒤 튀빙겐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518년 21세의 나이에 종조부 로이힐린의 도움으로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대학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되어 루터를 만나게 된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멜랑히톤은 루터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으며 친구 중 하나였다.  루터가 ‘여윈 새우’라고 부를 정도로 병약한 학자의 전형이었던 그는 신학적으로 루터에게 의존적이었다. 그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이든지, 9년 뒤 코부르크성에 머무를 때이든지, 그리고 루터의 사후에도 마음 든든한 선배를 늘 그리워하였다.
한편 ‘비텐베르크의 에라스무스’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그는 냉철한 조직력의 소유자로서 훨씬 더 즉흥적인 루터와 구별이 되었다. 루터는 멜랑히톤의 방법론적인 신학적 재능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저술들은 장황한 말 때문에 쓸모 없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멜랑히톤은 종교개혁 신학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 표현하였다. 이때문에 그는 후대에 ‘독일의 교사’로 불리어 왔다.
멜랑히톤은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았던 종조부와 의절할 정도로 루터를 따랐다. 당시 루터는 여러 곳에서 무섭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종조부는 훌륭한 인문주의적 지식을 루터를 위해 사용하며 루터를 추종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비텐베르크 대학을 떠나라고 종용했지만 멜랑히톤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종조부는 의절하고 말았다. 루터와 멜랑히톤 두 사람은 한 목표를 향해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루터 같은 사람에게는 멜랑히톤이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에라스무스처럼 뛰어난 고전과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논리적 치밀함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2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루터에 대해 104가지 조목으로 정죄했다. 루터 측의 반박이 필요했다. 이때 루터를 옹호하면서도 소르본의 신학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멜랑히톤이 썼다. 글의 제목은 도발적이게도 ‘파리의 멍청한 신학자들의 광포한 칙령을 논박함’이다. 도발적인 제목과 달리 글은 매우 치밀하게 조목들을 반박하고 있다. 이렇게 멜랑히톤은 날카롭고도 치밀한 글로 루터를 옹호했다. 이미 루터는 1519년 9월 19일 성서학 학위 획득에서 멜랑히톤의 글을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멜랑히톤은 1521년에 ‘신학강요(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의 초판을 발행했다. 이 책은 그가 해왔던 로마서 강의를 발전시킨 작품으로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 작품이다. 그는 성서에 기초하여 학문적으로 종교개혁을 옹호했다. 이 책은 루터교 신학의 최대 걸작이자 루터주의 신학의 근본원리로 받아들여졌다. 루터는 ‘노예의지론’에서 이 책으로 인해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 완벽하게 반박되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멜랑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치밀하게 이론화하고 교리화했다. 루터가 종교개혁가로서 전면에 나서서 주장하면, 멜랑히톤은 책과 글로 이를 뒷받침했다. 멜랑히톤은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훌륭한 학자나 대학 행정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교육 헌장을 만들고 교재, 교과목의 새로운 편성 등 대학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교육체제를 개혁했다. 그의 교육개혁은 독일 전역의 대학에서 받아들여져 학생들은 그를 ‘독일의 스승’이라 불렀다.

루터가 큰 일을 한 것은 자신도 수고하였지만 주변에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서로 도우며 특별히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동역자들로 서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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