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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이름: 배진기 * http://phac.or.kr


등록일: 2019-11-07 15:20
조회수: 19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






1. 루터의 출생과 성장



     

* 루터의 생가 *




1) 출생과 어린시절




  

*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베드로와 바울교회 *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더(Hans Lud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출생했다. 아이슬레벤의 가난한 농부였던 한스 루더는 만스펠트라는 광산촌으로 이주해서 광부로서 성공을 하여 시의원까지 되었다. 이로 인해 루터의 가정은 중산층 가정으로 생계에 지장이 없었지만 상당히 검소하여, 모친은 다른 동네 부인들처럼 장작을 주웠다고 한다. 루터는 만스펠트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하였다.  
독일 정부는 루터가 태어나고 죽은 도시 아이슬레벤(Eisleben)을 "루터의 도시 아이슬레벤(Lutherstadt Eisleben)" 으로 행정적 공식명칭을 지어 부르고 있다. 루터의 도시로 명명 되어진 도시는 아이슬레벤과 만스펠트 비텐베르그이다. 루터의 도시 아이슬레벤에는 루터가 태어난 생가와 루터가 임종을 맞았던 사가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만스펠트의  어린 시절 루터의 부모와 루터가 다녔던 성 게오르그 교회의 입구 상단에 루터를 상징하는 소년과 사과나무 그림이 있다. 루터는 소년시절에 “내일 지구의 종말이와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떤 분들은 이 말을 스피노자의 말로 잘못 알고 있다. 여기에서 루터의 기본 신앙자세와 삶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루터의 이 신념 때문인지 만스펠트가 독일 초등학생들의 수학여행지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고 한다.



* 만스펠트 게오르그교회 정문 장식 *


만스펠트의 구 시가지의 중심가에 가면 삼면으로 이루어진 큼직한 루터분수 (Lutherbrunnen) 가 있다.  각면 마다 루터 생애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한 면에 루터의 소년 모습과 함께“세상으로( Hinaus in die Welt) " 라고 부조되어 있다. 다른 한 면에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 교회 문에 붙이는 모습과 함께 ”싸움으로(Hinnen in den Kampf)" 라고 부조되어 있다. 또 다른 한 면에는 보름스의 재판정에 당당하게 선 루터의 모습과 함께“승리로(Hindurch zum Sieg)" 라고 부조 되어 있다.
  
  


루터의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 정부에서는 만스펠트를 소년들의 꿈을 키우는 특별 프로그램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2) 루터의 성장과 교육



루터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에 부담을 느낄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진로문제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정해야 했는데,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가 되어 사회적 성공을 하게 하려고 루터에 대한 교육열이 높았다. 한스 루더는 루터가 고등교육 과정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1497년 작센 안 할트의 주도인 마그데부르그에 유학을 보낸다. 루터가 들어간 마그데부르그 성당 부속학교인 돔 슐레 기숙학교는 라틴어 교육을 시키는 사립학교로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공동생활경제단이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경건생활이 그 학교의 중심이었다. 1년 이지만 루터의 삶에 경건이 자리를 잡은 기간이었다. 루터도 마그데부르그에서 습관이 된 경건생활의 유익에 대해 항상 인정하고 감사했다. 경건이 습관이된 루터는 평생 경건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마그데부르그의 학비가 부담이 된 한스루더는 루터를 마가레테 린데만의 고향 근처인 아이제나흐로 보낸다.  아이제나흐에는 외가의 친척들이 많았고 루터는 외가의 친척인 부인의 집에 유숙하며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



* 아이제나흐의 루터 하숙집에 있는 루터 박물관 *


1498년부터 1501년 까지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루터는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그가 다니던 성 게오르그 교회에서 성가대로 봉사하였다.

  

*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그 교회 *


성 게오르그교회는 나중에 바하가 성가대장으로 섬겼던 교회다. 아이제나흐는 바하의 고향으로 그의 집이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바하는 루터보다 300년 뒤의 사람으로 루터에 의해 시작된 코랄을 발전시킨 음악가이다.



* 아이제나흐의 바하의 집과 동상 *


아이제나흐에서 대학 진학 준비를 마친 루터는 1501년 당시의 명문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루터는 교양학부를 마치고 1502년 9월 문학 학사학위, 1505년 1월 17명 가운데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루터는 예비학교를 마친 5월에 아버지 한스 루더의 소원에 따라 본격적으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 슈토테른하임의 기념비 비문에 성 안나를 향해 기도했던 루터의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


 루터가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 하던 중 만스펠트의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1505년 7월 2일 에르푸루트 근교인 슈토테르하임 인근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 성 안나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 성 안나(성모의 어머니)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아들의 진로변경에 좌절을 느낀 부친의 분노어린 반대에도,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되었다.


3) 루터의 수도사 헌신





* 수도사 시절의 젊은 루터 *


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뇌했는데 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원장이었던 요한 폰 스타우피츠는 루터의 멘토가 되어 루터를 지도해주었고 1507년2월27일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죄를 해결하는 일에 대해 번민했던 루터는 수도사로 있는 동안 몸부림의 시간을 가졌고 지금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가면 루터가 기도의 자리를 가졌던 골방을 볼 수가 있다.

  

* 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과 루터의 골방 *


 수도원장 스타우피츠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3세가 세운 비텐베르크 대학에 교수로 갈 때 루터를 데리고 가므로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교단 수도원으로 이전하여 신학공부를 계속하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양과정의 도덕철학 강의를 하는 임무를 받았다. 이후 루터는 이곳 비텐베르크에서 논리학, 물리학 교수를 거쳐서 신학 교수가 되었다.

 1510년 11월에는 수도사 회의의 사명을 띠고 로마 여행을 하였는데 이 여행에서 루터는 교회의 여러 가지 부조리를 알게 되었다. 루터가 라텐란 성당에 있는 빌라도의 28개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며 무릎으로 오르다가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중간에 일어나 내려왔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1512년 10월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성서학 교수와 성서주해 강의를 책임지도록 임명받았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자신의 성인 루더(luder: 사냥꾼)를 루터(Luther:자유자)로 표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감사했던 것이다.



* 루터 당시의 비텐베르그 *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임명받았었다. 수도원 설교자, 일반 학문 프로그램 책임자, 부수도원장, 교단의 교구 주교대리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작센 교회 수도원들을 감독하는 책임을 지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514년부터는 비텐베르크 교구 교회의 목회 책임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1515년 루터는 10개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고 그가 수도원 책임자로서 로마를 방문한 이후 루터는 카톨릭의 부패에 대해 실질적인 눈을 뜨게 된다.


4) 루터의 개혁도전






* 루터가 강의했던 비텐베르크 대학 (일명 로이 꼬레아)의 오늘의 교정 모습 *


루터가 많은 직책을 맡아 일했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등을 강의하였다. 루터가 하나님의 의와 그의 백성의 의롭게 됨에 관한 종교개혁의 발전을 한 것이 바로 이 시절임이 분명하다.  경건생활을 통해 루터는 로마서, 시편, 갈라디아서를 새롭게 강의하기 시작했으며 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확립하게 되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골방에서 말씀묵상과 기도의 생활을 통해 마침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1:17)”는 <이신득의>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 비텐베르그의 루터의 골방 *


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의해 설교 중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대학교회였던 비텐베르크 의 성 교회의 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다. 다만 루터가 물리적으로 논제를 교회에 게시했는지 여부는 확인된 바는 없다. 반박문은 루터가 수기한 후 인쇄되어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며, 책으로 발간한 후에도 교회의 문 또는 인근에 이를 게시했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 교회 벽 게시에 대해 최초로 거론한 사람은 필리프 멜란히톤이며, 루터 사후 자신의 저서에서 루터에 대해 언급한 것이 반박문을 벽에 게시한 일을 기록한 최초의 것이다.



* 루터가 95개조 개혁조항을 내걸었던 비텐베르그 성 교회 정문 . 현재는 동판에 95개조 항이 부조되어 있다 *


 면죄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고백을 듣고 죄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 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는데 면죄부는 이러한 보속을 면해주는 증서였다. 그런데 면죄부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되면서 교회는 면죄부 영업에 열을 올렸는데, 실제로 요한 테첼은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천국 향해 올라가리라”고 신자들을 기만하였던 것이다. 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작센 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았으며, 성서도 적절히 인용하고 연옥에서 당신들의 부모가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감정에도 호소함으로써 순진한 신자들을 현혹하였다. 이러한 타락에는 교인들도 원인을 제공하였다. 실제로 중세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진지한 신앙생활보다는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죄의식을 면하려는 손쉬운 신앙생활을 좋아하였으며,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교회의 주장이 과연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5) 루터의 개혁과 신학논쟁






교구민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적 책임감에 움직여 루터는 이미 이전에 행한(1516년 10월 31일과 1517년 2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의 재고 요청들이 결국 실패하자 루터는 공개 논쟁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여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의 만인 성자 교회(de)의 문에 내걸었던 것이다.


   * 비텐베르그 성 교회 *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제1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제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제68조).
마지막 논제(제95조)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내린다.



* 비텐베르그 시청 광장 루터와 멜랑히톤의 동상이 서 있다


 비텐베르크 대학의 관례에 따라 대학 내의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마치 천사들이 전령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전 독일로 퍼져나갔을 뿐 아니라, 전 유럽에 미치게 되었다. 95개 논제 발표후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루터의 주장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바르고 강한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서 온 세상에 메아리로 번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여, 스콜라주의 영광의 신학 , 즉 힘과 정복을 추종하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은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던 영광의 신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조한 은혜의 신학이기도 하였다. 지금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정원 주차장에 하이델베르그 논쟁을 기념하는 원형 동판이 자리하고 있다.



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종교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 지시하였다. 그러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비텐베르크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추기경 토마스 카예탄(Thomas Cajetan)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토마스 카예탄은 1518년 10월 12일 - 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교령(Unigenitus. 1343년)을 가리키면서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닌,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죄인이라는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는, 루터의 표현대로 수동적인 의인 칭의론(이신칭의)도 굽히지 않았다. 카예탄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선제후프리드리히 3세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 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1519년 1월) 교황청의 특별한 호의의 징표인 황금 장미를 가진 밀티츠(de:Karl von Miltitz)가 선제후에게 나타났다. 그는 선제후가 루터를 추방하라는 카예탄의 요구를 이미 거부한 것을 모르고 루터를 추방하거나 로마로 압송할 경우 선제후에게 있을 유익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루터를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 요청에 따른 만남은 허락되었다. 회합을 가진 두 사람은 이제 이후로는 피차 공적으로 침묵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 그러나 잉골슈타트 대학교의 교수 요한 에크가 침묵을 깨고 루터를 공격하자 루터는 동료인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와 함께 라이프치히로 따라가 그와 논쟁을 벌였다(1519년 7월 4일 - 7월 14일). 요한 에크는 자신의 대학이 아닌 라이프치히 대학교를 교묘하게 비텐베르크 대학의 도전자로 끌어들였다. 이 두 대학은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2개의 작센(de)을 대표하는 대학교들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고 콘스탄스 공의회(1414년 - 1418년)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고, 에베소서에 근거하여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주장하였다.


* 잉골슈타트 대학교의 교수 요한 에크*


루터와 에크의 논쟁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교황의 기원과 권위에 관한 것.
에크는 교황권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교황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권세는 위조문서인 '이시도리안 교령집(de)'에 기초하여 세워졌으므로 허위라고 반박하였다.
2) 성경의 권위에 관한 것.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도리와 생활의 규범이 되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자고 외쳤다. 반면 에크는 '오직 성경' 사상은 중세 말 현대주의 사조를 따르는 이단들의 주장이라고 지적하며 루터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웠다.
3)  연옥에 관한 것.
에크는 연옥사상이 마카비 2서 12장 45절에 나오므로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루터는 마카비서가 성경이 아니라 외경에 불과하다고 하므로 신적인 권위가 없고, 따라서 연옥교리는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4) 면죄부와 고해성사.
에크는 면죄부와 고해성사가 교회 전통에 근거한 것이므로 교회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잘못될 수 있고, 오직 성경만이 오류가 없으며, 면죄부와 고해성사는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이 논쟁을 계기로 해서 루터는 작센 공국(Herzogtum Sachsen)의 작센 공 게오르크(de)와 대립되었으나, 한편 그의 단호한 태도는 멜란히톤 같은 이를 우군으로 얻었다.

라이프치히 논쟁은 루터에 대한 기대도 증대시켰고 그에 대한 공격도 가속화 시켰다. 엑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를 이끌어냈다.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 《Ex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에서 교황 레오는 뉘우칠 수 있는 60일간의 말미를 주고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위협하였다. 교서는 루터의 작품 중에서 41개 발언들을 열거하면서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단죄하고,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 뢰번에서 불탄 사건 이후 그리고 파문 위협을 담은 교서가 아직 비텐베르크에 도착하기 전, 성(城)의 엘스터 문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 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의 화형식을 12월 10일 거행했다. 이로써 루터와 로마 사이의 모든 다리도 불에 타 버렸다.



*루터가 로마법전 화형식을 했던 기념장소 *



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하는 교황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는 1521년 1월 3일 로마에서 공포되었다. 자신에 대한 파문은 루터의 영혼 깊숙이 상처를 내었다. 사실 루터는 면죄부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에도 교황에 전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는 면죄부의 오용들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바로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교황청이 로마교회를 적그리스도에게 넘겨주었다는 확신이 서게 되자, 그때 루터는 비로소 교황청에 반격을 결심한 것이었다. 따라서 루터가 과거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급작스레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 관계에서 돌아선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자기는 철저히 외면을 당하였으며 세 번이나 출교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 교황의 파면에도 불구하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필두로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회의에서 루터가 자신을 위해 변호할 기회를 얻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카를 5세 황제는 신변의 안정 보장을 약속하면서 루터에게 1521년 3월 6일, 초청장을 보냈다. 황제의 안전 보장은 믿을 바가 못되었다. 선제후의 궁전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였다. 결국 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루터가 선택할 몫이었다. 루터는 주위의 우려와 권고를 물리치고 단호하게 보름스를 향했다. “  우리는 보름스에 입성할 것이다. 지옥의 모든 문들과 하늘의 모든 권세들이 막으려고 할지라도 … 거기서 우리의 사명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  
슈팔라틴(de)도 그의 결연한 모습을 감지했다. “  그는 보름스로 가려고 한다. 그곳의 지붕위에 있는 기왓장의 수만큼이나 마귀들이 있을지라도….  ”  
보름스에 1521년 4월 16일 도착한 루터는 다음 날 첫 번 청문회에 참석하였다. 트리어 대주교의 고문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에 답하도록 물었다.
“  (1)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그대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2)그대는 이 책들에서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첫 번 질문에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라 시인하고 자신이 쓴 책들이 더 있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 질문에 루터는 하루의 여유를 구했다.
루터는 4월 17일 저녁에 비엔나의 요하네스 쿠스피니아누스에게 그날과 다음 날의 일에 대해 편지를 썼다. “  … 이 순간 나는 황제와 사절들 앞에 서서 철회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받았다 … 내일 나는 철회에 대한 답변을 할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이 하루 이상은 허락이 안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한 영원히 한 글자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  ”  



* 루터가 카를5세 앞에서 선언한 자리 *


다음날(4월 18일) 루터는 황제 앞에서 담대히 대답했다. “  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죽음을 무릎쓰고 출두한 일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보름스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장면을 인류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지옥 그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했던 루터의 행위는 두려움 없는 최고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6) 루터의 성경번역






  

* 루터가 신약성경을 번역한 바르트부르크성과 골방 *



 카를 5세 황제는 루터에 대한 신분 안전 보장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루터가 3주 이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과 도중에 설교와 저술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루터는 아무도 모르게 동료들과 함께 보름스를 떠났다. 길을 가던 중 루터는 프리드리히 3세가 미리 주선한 대로 위장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갔다. 여기서 루터는 게오르크 기사 행세를 하며 10개월간 지냈다. 한편 루터가 보름스를 떠난 후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서 루터를 법에서 추방된 자라고 선언하였다. 이제 법적으로는 누가 그를 살해한다고 해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가르침은 파리, 뢰번, 쾰른 대학교 신학부로부터도 정죄당하였다.



바르트부르크 성에 칩거하면서 게오르그 융이라는 이름의 기사로 변신한 수염을 기른 루터 *


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강제된 휴가’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이 기간을 성서 주석,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의 서면 논쟁, 논문 저술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의 번역에 사용하였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9월 성서(Septemberbible)’로 불리게 되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독일 기독교인들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하고, 독일어 발전에 이바지한 신학적, 언어학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독일 종교개혁 이전에 사용된 성서는 라틴어 성서였으므로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는데, 성직자들은 이를 악용하여,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의 목회적 필요에 따라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터가 고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면서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어, 독일 기독교인들은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루터가 성서 번역에 사용한 고지 독일어는 현대의 표준 독일어가 되었기 때문에, 루터의 성서번역은 독일어와 문법이 통일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는 보통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슈팔라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성서 번역의 원칙을 알 수 있다.  “  우리들은 당신에게 때때로 적합한 단어를 물어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단순한 말을 가르쳐 주십시오. 궁정이나 성 안에서 쓰는 말은 사절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순성으로 유명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 루터의 독일어 성서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덕분에 빠르게 보급됨으로써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성직자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도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성서를 축자영감설등의 경전적 해석에서 벗어나, 사회학, 수사학, 사본들과의 비교, 역사등의 학문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여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성서비평이 태동하는 거름이 되었다.


멜랑히톤이 루터를 대신하여 아우구스부르그 논쟁에 참여 하였을 때 루터는 핍박을 피하여  코부르그 성에서 칩거하면서 구약성경을 번역하였다. 주로 시편의 번역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7) 루터와 급진적 개혁



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가 교회를 무력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세 명의 ‘츠비카우의 예언자들’도 합세를 했다. 성만찬에서는 그때까지 평신도에게 거부되었던 포도주도 제공되었으며, 혁신적인 예배양식과 예복이 도입되었고, 로마 가톨릭 미사를 거행하던 수도사들은 돌에 맞았으며, 성상들은 교회에서 제거되고 불태워졌으며 소요가 일었다. 루터는 믿음의 일로서 시작한 자신의 일이 오해받고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끼자, 12월 중 비텐베르크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5일간 머물다 돌아갔다. 이 때의 느낌을 슈팔라틴에게 쓴 편지에서 루터는 저들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강제 조항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  나는 어느 누구도 폭력과 피흘림을 가지고서 복음을 위해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말씀을 통해 세상은 정복되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구원받으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부흥한다.  ”  
 소요가 계속되자 루터는 자신의 망명지를 떠나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교회에서 8일간 연속으로 설교하였다. 말씀만이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안녕과 질서가 복구되었던 것이다. “  요약하여, 나는 말씀을 설교하리라. 나는 말씀을 말하리라. 나는 말씀을 적으리라.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도 강제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으리라. 믿음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지 강제되거나 강압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1520년 사이에,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단절 과정을 겪었으나, 한편 개혁 진영 내부 세력들과의 차별화 과정도 겪었다. 먼저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 토마스 뮌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개혁운동과의 차별화(1521년-1525년), 다음으로는 에라스뮈스 그리고 인문주의자들과의 차별화(1524년-1525년) 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농민, 토마스 뮌처, 인문주의자들에게 루터가 외면을 받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급속한 발전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이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라든가, 인문주의적 계몽, 그리고 사회정치적 급진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 이 과정들에 있어서 공통점은 루터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성서가 정경화를 통해 등장하기 전에는 교회가 있었다는 이해에 따라 교회와 전통의 권위를 성서위에 올려 놓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루터는 ‘성서만으로’를 주장하였고,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의 주관적인 계시이해에 대해서는 성서의 객관적인 말씀을 주장하였으며,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는 성서가 말하는 확실성을 주장하였고, 복음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농민혁명에 대해서 복음은 오직 양심만을 상대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만 된다면 그 결과는 저절로 온다고 확신하였다.
“나는 면죄부와 모든 교황주의자들을 반대하였으나 결코 무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잠을 자거나 친구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de)와 함께 비텐베르크 맥주를 마시는 동안 말씀은 교황을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그 어떤 군주나 황제도 그 정도의 해를 입힐 수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말씀이 다 했다.  ”  


8) 루터와 결혼






* 선제후가 비텐베르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건물을 루터의 집으로 선물하여 살았고 오늘날 이곳은 비텐베르그 루터 박물관이 되었다 *


루터는 42세이던 1525년 6월 13일 결혼을 했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de)였다. 루터는 자신의 결혼의 목적이 늙은 아버지에게 자손를 안겨 주기 위해서, 또한 결혼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설교를 몸소 실천하면서 본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 나는 내가 가르쳐 온 것을 실천으로 확증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복음으로부터 오는 그렇게 커다란 빛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소심한 이들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행동을 뜻하셨고 또 일으키셨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에 빠졌다’거나 욕정으로 불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 루터 박물관 앞 마당에 있는 폰 보라의 동상 이 박물관 오른쪽에 폰 보라 레스토랑이 있다 *


그러나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 다 반대하였다. 동료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마귀가 웃을 것이며 그 자신이 그동안에 이루어 놓은 일을 다 헛수고로 만들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특히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그의 결혼선언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9) 루터와 음악






 루터는 음악이 신학 다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하였다. 음악은 신학과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영혼을 고치고 영들을 소생시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음악이 없으면 인간은 목석과 마찬가지이지만 음악이 있으면 마귀를 멀리 보낼 수 있다. 루터는 이것을 영적인 고통 가운데에서 직접 경험하였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 나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중요하게 보며 무한히 아낀다.”고 하였다.



 한편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한정된 이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어 오던 성가를 만인의 소유물로 돌려주었다. 이전의 그레고리오 성가에서는 미사때 회중은 잠잠히 있고 성가대의 전문가들만이 영광송(Doxology)을 번갈아 불렀다. 그러나 루터는 일반 회중도 찬송을 부를 수 있게 전례 즉, 예배 양식을 개혁하였으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비롯하여 많은 찬송곡을 작사, 작곡 하였다. 그의 곡들은 <코랄>이라는 장르로 자리 잡는다. 그는 자신의 ‘작고 못생긴 목소리’를 불평했지만 플루트와 류트를 연주하는 능수능란한 음악가였다.
루터는 사람을 움직이는 성가의 능력을 믿었다. 성가는 보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배운 이들에게도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가장이 가족에게 찬송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 루터가 살던 시대에 개신교 목사들의 수준은 낮았다. 개신교 목사들은 부패하고, 부도덕했으며, 주정뱅이, 직접 술집을 운영하는 자도 있었다. 교인들이 연보를 하지 않아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성직자들도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동지인 멜란히톤은 1528년 3월 《선제후령 작센의 교구목사 시찰자를 위한 지침서》를 제작하여 교구목사들을 교육하고자 했다. 영방에 소속된 개신교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국가에 소속된 공무원과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성서와 신앙을 가르칠만한 역량을 갖춘 성직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자들이 주관하는 성직고시를 합격하고, 대학교 교육을 받아야 했으므로 개신교 성직자들의 수준이 높아졌다. 영방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감독회에서는 사회복지, 결혼, 예배, 신앙교육등을 담당했다.


10) 루터와 죽음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63세로 사망하였다. 이때 그는 만스펠트의 백작들 사이에 있었던 법적 논쟁을 중재하러 가 있는 중이었다. 루터가 사망하던 밤 의사와 그의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루터는 다음 성경 구절을 계속 암송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3:16)
새벽 세 시가 가까워 요나스 박사는 마지막이 이른 것을 알고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교리와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루터의 몸이 움직이면서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루터의 유해는 비텐베르크로 옮겨져 만인 성자 교회에 안치되었다.


11) 루터의 신학사상






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었다. 그의 종교개혁 작업의 핵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고 그 위에 자신의 종교를 쌓아가려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라고해서 성서의 권위와 성령의 감동(영감)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또한 선행(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르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믿음의 중요성에 무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급진적이었던 것은 이 말들 앞에 붙은 한 작은 단어, “오직”(sola) 이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것들을 말하면서도 실은 그 밑바닥에는 인간 중심의 종교가 사로잡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서의 권위를 말하면서도 성서를 해석하는 교황의 권위를 그 위에 세웠으며, 은총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이 율법의 의를 쌓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능력’으로만 이해하였고,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처음에는 시작하다가 어느덧 ‘선행(善行)으로 형성된 믿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  루터의 신학사상의 중심은  오직 말씀(Sola Scriptura)  오직 예수 그리그도( Solus Christus)  오직 은혜 (Sola Gratia)  오직 믿음(Sola Fide) 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이었다.
“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가르침은 교리뿐만 아니라 윤리, 문화, 정치에까지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루터는 이 조항 위에 교회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고 그 중요성을 강변하였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더 이상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를 드릴 필요가 없다. 대신 그는 그의 행위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베푼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calling, 부르심) 안에서 충실할 때 누구보다도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율법의 완성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 루터의 신학은 섬김의 신학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노동을 하지 않고 구걸하는 것 곧 무위도식에는 "구걸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고, 윤리에 어긋나며, 인간 존엄성에도 어긋난다."라는 논리로 반대했지만, 배우자와의 사별, 질병, 강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악 등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곤경에 처한 형제를 돕고 섬기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큰 예배"라며 찬성하여 매주 주일마다 라이스니히 시에서 시민들이 매 주일 예배때마다 공동모금함에 봉헌하여 모아진 헌금으로 병·연로함 등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시민들을 돕는 라이스니히 금고규정(1523년)에 서문작성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전통은 북유럽에도 번져나간다.


11) 루터의 반 유대주의




루터는 1543년에 발표한《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Die Juden und ihre Lügen)》이라는 글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불지르고, 그들을 죽이고,매장하고 회당을 무너뜨리고, 탈무드를 빼앗으라"고 주장하며 갑자기 유대인 탄압을 선동한다. 루터의 이런 주장은 19세기 초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독일에서 기독교사회노동당 대표인 아돌프 슈퇴커(Adolf Stoecker) 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갔고 나치에게 파급되었다. 또한 루터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협박까지 해 가면서 유대인들에 대해 인도주의를 제공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12) 현실권력과의 결탁






* 루터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선제후 프리디리히3세 *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지배계급들과의 결탁에 의해 진행되었으므로, 독일농민들이 제후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민중항쟁을 벌이자(독일 농민전쟁), 제후들에게 서신을 보내 진압해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루터는 농민항쟁 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후들의 착취에 맞서 계급투쟁을 벌이는 농민들을 사회를 위험하게 하는 폭도라고 비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제후들과의 결탁이 유지되지 않으면 종교개혁이 진행될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에서 농민항쟁 진압을 주장하였다. 즉 루터에게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지배질서로부터 민중을 구원하는 성서의 하나님보다, 현실권력인 제후들과의 결탁을 통한 종교개혁 진행이 중요했던 셈이다.
실제적으로 선제후 프리드리히3세와 그 동생 프리드리히4세의 후원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뒷 배경이 되어 주었고 선제후는 비텐베르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건물을 루터의 집으로 선물하였고 지금 그곳은 비텐베르크 루터 박물관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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