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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 칼빈(John Calvin)
이름: 배진기 * http://phac.or.kr


등록일: 2019-11-10 15:05
조회수: 558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 혹은 장 칼뱅 (프랑스어: Jean Calvin) 으로 불리는  칼빈은 루터의 뒤를 이어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입니다.

1. 칼빈의 출생과 성장 (1509-1531)


1) 존 칼빈 (John Calvin) 의 출생


종교개혁의 완성자 요한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오후 1시 27분에 프랑스 북부의 피카르티 우아즈  데파르트망의  누아용(Noyon)에서 제라르 코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들은 사촌으로 추측되는 삐에흐 다뚜와(Pierre Dartois)의 집을 임대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칼빈 생가는 1927년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들이 느와용을 점령하면서 동행한 학자들에 의해 찾아내었고 폐허가 된 건물 앞에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생가”라는 팻말을 만들어 알려주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칼빈의 생가임을 알리는 역사적인 장면을 찍은 흑백 사진은 역시 박물관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칼빈의 생가 전면과 좌, 우 측면의 모습


생가는 독일군이 후퇴하는 1918년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927년~1930년에 개신교 건축가 샤흘르 르트혼(Charles Letrosne)에 의해 새롭게 재건되어졌습니다.  칼빈을 기념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역사 협회(Société de l’Histoire du Protestantisme Français)가 적극적으로 설립을 주도하여 누아용 시내의 아리스티드 브리앙 광장(Place Aristide Briand)에 있던 오래된 칼빈의 고향집을 박물관의 전시공간으로 꾸미고   "장 칼뱅 박물관(Musée Jean Calvin)" 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1층 칼빈이 출생한 방의 마루 바닥 일부분만 남아 있으며, 나머지 건물은 17세기 건축물의 그림과 판화를 기초로 추정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에 의해 본래의 생가의 모습이 또 한차례 파손이 되고, 1954년에 다시 복원되었으며 1983년에 현대식 설비를 갖추게 되었고,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어머니에게서 종교적 성향을 물려받았고 분별력을 배웠으며, 어머니의 부유함으로 귀족들과 친분을 쌓고 교제하므로 귀족적 자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편 어머니를 통해 여성적인 섬세함과 민감함도 갖게 되었으며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감정이 상하는 예민한 성향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독실한 종교생활을 유지하도록 배운 유아시절, 1515년 칼빈의 나이 6세에 모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우울한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교육을 중시했던 그 당시의 분위기로 인해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 코뱅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과부와 곧 재혼을 하게 됩니다.



칼빈의 생모 쟌느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 코뱅은 크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끈기와 집념으로 시민계급을 갖게 되었고, 칼빈의 생모 쟌느와 결혼하면서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쟌느는 제라르보다 1년 늦은 1498년에 느와용에서 시민 계급을 갖게 되며 시의원이 되었고, 느와용 시청 건설에 책임자로 참여할 정도로 주요 인사가 되었습니다.
제라르는 자신의 기반을 바탕으로 주교 샤흘르 드 앙제스(Charles de Hangest)와 1501년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누아용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 회원이 되어 대주교 샤흘르 드 앙제스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막강한 권력 가문가인 앙제스의 이름은 느와용 성당 입구에 있는 역대 주교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Noyong Cathedral


참사회
참사회는 카톨릭 교회의 교구나 수도회에서 주교나 수도원장의 자문에 응하여 행정에 관한 모든 안건을 심의하는 자문기구를 말합니다.


칼빈은  누아용의 주교 앙제스의 형제인 영주 몽모(Montmor)의 아들들과 아주 친밀하게 지냈으며, 이들 가문의 도움으로 제라르의 세 아들들은 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현재 복원된 칼빈의 생가는 칼빈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되어 있지만 시에서 운영을 하므로 카톨릭을 불편하게 하는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유물들은 없습니다.  칼빈의 생가 전면 외벽에 "장 칼뱅 박물관(Musée Jean Calvin)" 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장 칼뱅의 초상화와 문헌자료, 미사를 알리는 16세기 벽보, 초기 신교도들이 사용하던 성경 등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 국제 종교개혁 박물관(Musée international de la Réforme de Genève)'과 함께 존 칼빈의 업적을 기리고 생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전시관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먼저  칼빈의 삶을 대변하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의미하는 두 번째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고 있는 칼빈의 초상화와 ‘당신의 종 존 칼빈’이라고 기록한 칼빈의 사인을 볼 수 있습니다.



1550년 경의 칼빈 사인,  Votre serviteur Jehan Calvin
(당신 혹은 여러분들의 종 존 칼빈).


그의 사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칼빈은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쟈크 르페브르의 번역 성경, 사촌형인 올리베땅의 번역 성경 그리고 칼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제하흐 후셀과 칼빈의 가르침을 전수하여 가르쳤던 삐에흐 드 라 하메(Pierre de La Ramée)의 석상을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의 생가에 보존 되어 있는 기독교 강요 초판 원본


이곳에는 최초 불어 번역 성경과 최초 기독교 강요 원본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소르본느 대학에서 빌려가므로 방문자들이 볼 수 없는 날이 있다고 합니다.



원어성경을 최초로 불어로 번역한 올리베땅의 번역성경


불어 성경은 칼빈의 사촌인 올리베땅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본을 참조하여 1535년 뉴샤델에서 번역하었고 칼빈이 서문을 기록하여 인쇄되었습니다.

2층에는 개혁자들이 개혁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저술과 종교 회의와 관련된 내용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초본을 비롯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개신교를 인정한 뿌와시 종교 회의(Le colloque de Poissy) 장면을 그린 그림 등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개신교를 인정한 뿌와시 종교 회의(Le colloque de Poissy) 장면


유독 시선을 끄는 것은 칼빈이 동역자들에게 교회를 주님과 말씀에 맡긴다는 유언 장면의 그림입니다.



3층에는 위그노와 관련된 전시장으로 핍박을 피해 광야 교회에서 사용된 이동식 강대상과 체포된 위그노들이 범선에 잡혀가 노예를 대신하여 노를 젓는 형벌을 받았던 모조 범선이 있습니다.



특히 위제 알라드(Huijeh Allardt)의 1562년 작품인 ‘성경의 무게’를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갖는 무게는 사탄과 교황과 모든 인간이 기록한 책과 모든 사제들의 권위를 합쳐 놓아도 성경의 무게가 더 무겁다는 것으로,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개혁자의 정신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칼빈은 1521년에 느와용 대성당 내에 제진(Gesine) 성당에서 성직록을 받게 되었으며 주임사제인 니꼴라 오흐비(Nicolas Orby) 를 통해 정결한 삶과 순종을 배우며 성가대원과 예배 돕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직록에 등록하면 무상 교육을 받게 되는데 성직록을 받은 칼빈은 얼마 뒤 학업을 위해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이때 주교인 앙제스 가문의 세 젊은 소년들과 함께 떠납니다. 그 중 두 명의 끌루드(Claud)가 있었는데, 한명은 훗날 느와용의 엘루와 수도원에 수도원장이 되며 칼빈은 그에게 자신의 첫 작품인 세네카의 관용론을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14세때 파리로 유학(1523년) 간 이후 부친위독(1531년)방문에 이어 1534년에 노용 방문 사제직을 반납한 이후  고향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 누아용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Noyon)





누아용은 중세부터 19세기 까지 카톨릭 교회 감독의 교구좌가 있는 도시였습니다. 자연히 감독이 집무하는 대성당이 필요하여  누아용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Noyon)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카톨릭의 성당 가운데 카데드랄(Chathedral)이라는 명칭이 붙는 교회는 감독교구좌나 주교교구좌가 있는 교회 로 건물들의 규모가 큽니다.누아용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Noyon)은 건축된 년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12세기  프랑스 카톨릭 교회의 시작과 함께 세워진 교회로  왕들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던 매우 오래된 교회이며 프랑스대혁명과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부가 파괴되고 불탄 것들이 5차례나 보수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2.  칼빈의 초기사역 (1532-1533)



  

칼빈의 첫 사역지 Old Paris


1)  1532년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최초의 작품인 「세네카 주석」을 출판했습니다.  칼뱅이 2번째로 파리에 체류하며 집필한 책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관용론 De clementia〉에 대한 해박한 연구서였습니다.

  


이 연구서는 1532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은 세네카가 네로 황제에게 바친 〈관용론〉의 본문을 주의깊게 재구성한 뒤 박학한 지식에 근거하여 방대한 주석을 쓴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칼뱅이 에라스무스와 뷔데의 모범을 따르는 인문주의자이며, 라틴어로 품위 있고 설득력 있는 글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네카와 네로황제


2) 이때 칼빈은 그리스어를 읽고 쓰기 시작했으며, 고대 문헌과 고대사에 대해 폭넓고도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수사학적인 분석에 커다란 흥미를 갖고 있었고, 당시의 중요한 논쟁에서 수사학자들 편에 서서 변증론자들에게 대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이러한 수사학적 기술과 태도는 칼뱅이 뒤에 종교개혁자로서 활동을 벌일 때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루터의 제자인 필리프 멜란히톤, 제네바에서칼뱅의 후계자가 된 테오도르 베즈 등 활동적인 프로테스탄트 인문주의자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게 했습니다.

2.칼빈의 회심(1532-1534)  



평소 가톨릭 교리에 회의를 품었던 칼빈은 마틴 루터의 저서를  읽고회심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의 회심연대를 뚜렷리 알 수 없으나 칼빈은 그때의 심경을 “하나님이 변화를 주셨다. 그분은 나로 순종하게 하셨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회심후 칼빈은  대대로 믿어온 로마가톨릭과 1532년 절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주의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칼빈은 1534년 고향인 느아용에 가서 12세 때부터 받아온 성직록을 반환했으며 성직을 포기하고 로마 천주교회와 공식적으로 결별하였습니다.



후일 칼빈은 이때의 심경을 “시편 주석”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이 목동의 신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지위로 높여졌듯이,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비천한 나를 택하사 복음의 설교자이자 목회자라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주셨다.”  

3. 칼빈의 바젤사역(1533-1536)



  

Old Bazel City


1) 1533년 당시 파리 대학은 인문주의자, 종교개혁자와 로마가톨릭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칼빈과 친분이 두터운 니콜라스 콥(Cobb)이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콥은 임명식장에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가톨릭의 중심지에 던진 폭탄과 같았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칼빈이 콥 총장의 연설문 작성에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 칼빈의 개혁운동은 1533년 11월 만성절에 그의 동역자 니콜라스 콥의 대학학장취임연설에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개혁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왕실의 진노를 초래하였습니다. 황제는 의회에 서신을 보내 왕국의 최고대학에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거리는 것을 경고하면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곧이어 칼빈과 콥은 당국의 소환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환에 응하면 죽을 것을 짐작한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경찰들이 그의 집을 급습하고 포위하자 침대보를 꼬아서 옆집으로 도망하여 피신하였습니다. 그 후,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피신하며 메츠, 스트라스부르그, 바젤 등지로 여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행 중에 자신의 하숙집 주인이었던 포르쥬가 화형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프랑스 국왕 프란시스1세 / 교황 클레멘트7세


3) 그 후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이단을 발본색원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콥의 배후에 있는 주모자를 체포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모든 개신교회는 뿌리가 뽑힐 정도로 박해를 받았는데 1534년 10월 파리시내에는 종교개혁을 위한 급진적 물결이 일어나 곳곳에 플랭카드와 전단이 뿌려졌고 이로 인하여 위협을 느낀 니콜라스 콥은 스위스 바젤로 도망쳤고, 칼빈은 비밀 장소에서 숨어 지내다가 1535년에 바젤에 합류했습니다.  당시 바젤에는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 1482-1531)가 종교개혁을 하고 있었습니다.

  


4) 칼빈은 스위스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536년 3월 개신교 최고의 고전으로 알려진 「기독교강요」초판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변호하고,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을 왕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칼뱅의 나이는 27세였습니다.

*《기독교 강요(基督敎綱要)》(라틴어: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기독교강요는 개신교 조직신학에 관한 존 칼빈의 저서입니다. 기독교 세계에 파란을 가져왔던 종교 개혁에 큰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의 개신교계에서도 그 영향력이 매우 크게 남아있습니다. 1536년에 6장으로 구성된 라틴어 초판을 시작으로, 1539년에 17장으로 늘어난 증보판을 라틴어로, 1541년에는 다시 칼뱅의 모어인 프랑스어로 출판하였으며, 1543년에는 다시 21장으로 늘어난 증보판을 출판했으며, 1550년에는 약간의 내용을 보충하는 정도의 증보판을 출판하였고, 결정판은 1559년판(라틴어)과 1560년판(프랑스어)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5) 칼빈은 “기독교 강요”로 인해 종교개혁 진영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칼빈은 종교개혁자들이 망명했던 슈트라스부르크로 망명을 떠났으나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으로 인해 길이 막혀 제네바를 거쳐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6) 이때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프랑스인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칼빈을 찾아와서 종교개혁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기욤 파렐이 칼빈을 찾아와 제네바 종교개혁의 동참을 요구했을 때 칼빈은 자기는 그냥 평생을 학자로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파렐은 “요나가 하나님 명령 어기고 도망하다가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는데 너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싶으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칼뱅은 그 말에 공포를 느끼고 제네바에 가서 종교개혁을 돕게 되었습니다.




4. 칼빈의 1차 제네바 종교개혁

(1536-1538)



    

옛 제네바 시


  기용 파렐에 의하여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네바 사람들에게 신앙고백과 엄격한 규율에 복종하기를 요구하다가 제네바 행정을 장악한 아미 페랭(Ami Perrin) 등 리버럴들로부터 함께 이곳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갔고, 파렐은 뇌사텔로 갔습니다.
파렐은 그로부터 27년동안 뇌사텔에서 목사로 일하면서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그, 메츠, 로렌 등으로 다니며 설교했습니다. 1549년에는 칼빈과 함께 취리히로 가서 쯔빙글리주의자들과 만나 ‘취리히 일치신조’를 작성했고, 또 1553년 10월에는 제네바에서 세르베투스가 사형언도를 받자 그를 찾아가 회개를 권고하기도 했으며, 1557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독일을 방문하여 그곳의 영주들에게 왈도파와 위그노들에 대해 중재를 촉구했지만 소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때까지 독신으로 있던 파렐은 1558년 12월 69세가 되던 해에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뇌사텔로 도망온 가난한 처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칼빈이 병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평소에 ‘내가 칼빈 대신 죽을 수만있다면!’이라고 말해온 그는 1564년  5월 2일 칼빈이 아프다는 편지를 받고 제네바로 가서 병상에서 숨쉬기도 힘들어 하는 친구에게 감동적인 작별을 고하고 그가 죽기 전에 뇌사텔로 되돌아왔습니다. 파렐은 그 후에도 여러 도시를 다니며 열정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여행은 1565년 5월에 작별을 고하기 위해 메츠의 개신교도들을 찾아가 설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생을 청빈한 삶을 살아온 그는 그해 9월 13일 7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외아들 또한 아버지가 떠난 3년 후 죽었습니다. 1876년 5월 4일 뇌사텔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제네바의 St.Pierr Cathedral



1) 칼빈은 제네바의 생 피에르(st.pierr)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시작하여 얼마 뒤에는 목회자로 일하였습니다.
2)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들은 힘을 합해 “신앙고백과 규율”“요리문답”등을 만들었으며 1537년1월16일 제네바 의회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3) 그러나 제네바의 토착세력들은 이에 반발을 하였고 강력한 개혁을 주장하는 칼빈과 파렐 등은 복음에 합당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며, 신앙고백서에 싸인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성찬을 베풀기를 거절하므로 의회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딪힘으로 결국은 1938년4월22일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 시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5. 칼빈의 스트라스부르그 사역

(1538-1541)




옛 스트라스부르그 시 전경


1) 제네바에서 추방을 당한 칼빈은 바젤에서 머물다가 마틴부쳐의 초청으로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위그노 (Huguenot) 들을 위한 목회를 하면서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칼빈은 회고하면서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스트라스부르크의 삶을 그리워하였습니다.

* 위그노 (Huguenot)





(1) 위그노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은 16세기에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음에도 계속 확산되었으며 귀족들 가운데서도 지지자가 생겨났습니다.

(2) 위그노라는 이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16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킬 때 분명히 쓰였던 단어입니다.

(3)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마르틴 루터의 저작물들이 유럽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프랑스에서도 개혁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는 시작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최초의 순교자가 1523년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1534년 10월 가톨릭 미사의식을 맹렬히 공격하는 플래카드가 거리와 왕궁에서 발견되자 가톨릭 세력은 큰 충격과 함께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이와 더불어 장 칼뱅(존 칼빈)을 포함한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핍박을 피해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곧 귀족들 가운데서도 지지자가 생겨났습니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도 계속되었으며 1명씩 처형되던 관행이 대량학살로 비화했습니다. 앙리 2세 치하에서는 대개의 감옥이 위그노들로 가득 찼습니다.
(4) 1559년 흩어졌던 위그노들이 파리에서 모임을 갖고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습니다. 이들은 칼뱅의 사상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는 루터파 교회가 아니라 칼뱅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5) 1562년 프랑스에서 위그노 전쟁이라 불리는 종교전쟁이 시작되었으며 1598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일어났던 유명한 사건으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1572년 8월 23일 파리에서 불이 붙어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위그노의 주요인물 거의 모두가 파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도 수천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이 학살사건 이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으며 1574년 샤를 9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앙리 3세 치세기에는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된 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앙리 4세는 프로테스탄트였으나 1593년 7월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비로소 왕국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6) 1598년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선포했으며 이로써 위그노에게 종교적·정치적 자유가 인정되었습니다.
  


위그노 십자가와 그 의미  


(7) 그러나 1620년대 루이 13세 치하에서 내란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결국 위그노가 패배했으며 1629년 6월 28일 알레스 평화조약을 통해 위그노는 종교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모든 군사적 우위를 상실했습니다. 더이상 정치적 실체로 존재할 수 없게 된 위그노는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습니다. 낭트 칙령으로 유지되었던 모든 권리들은 1643년 어린왕 루이 14세의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으로 효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위그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위그노의 권리를 박탈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으며 수천 명의 위그노들이 강제로 개종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의 철회를 선언했으며 그결과 여러 해에 걸쳐 프랑스에서는 25만 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영국·프로이센·네덜란드 또는 신대륙 아메리카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8) 18세기 전반에는 프랑스 국내에서 위그노가 완전히 사라진 듯이 보였습니다. 루이 14세는 1715년 프랑스에서는 이제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종교의식이 종식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님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재건을 위한 프로테스탄트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비록 그 수는 많이 줄어들었으나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9) 1745~54년에는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여론은 박해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 성직자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787년에 한 칙령을 통해 위그노의 공민권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기간중 국민의회는 종교의 자유를 명확히 인정했으며 프로테스탄트에게 모든 관직과 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좌) 마틴 부쳐(Martin Bucer) / 칼빈의 부인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 de Bure) (우)


2) 그는 그곳에서 종교개혁자 마틴 부쳐(Martin Bucer, 1491-1551)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칼빈은 목회를 하면서 신학사상이 훨씬 더 깊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마틴 부쳐의 중매로 1540년에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 de Bure)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몄으나 불행하게도 이들레트는 1549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 자크도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죽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3)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기독교 강요 개정판”을 1539년에, “로마서 주석”을 1540년에 내놓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개정판”을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1541년에 완성하였습니다. 이 프랑스어 판은 프랑스어로 쓰여진 최초의 신학전문서적으로 프랑스어의 발전에 큰 공헌을 세웠습니다. 당시 사제들의 전문언어인 라틴어로 기록되었던 신학서적이 프랑스어로 번역된 것은 평신들의 신앙발전에 큰 획기적인 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4) 또 칼빈은 이곳에서 성만찬의 규례를 놓고 극심한 대립을 하고 있던 루터주의파와 츠빙글리파 사이를 중재하는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을 1541년에 출판하였고 제네바 시민들을 카톨릭으로 돌리려는 로마의 추기경 야코포 사돌레토 (Jacopo Sadoleto)가 보낸 편지에 대해 반박하는 답변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5) 1541년에 제네바에는 종교개혁을 원하는 정부가 선출되었습니다. 그들은 칼빈이 떠난 이후 종교개혁을 주도할 지도자가 없었고, 가톨릭의 압력이 더 거세졌기 때문에 칼빈에게 제네바로 돌아와서 개혁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칼빈은 처음에 거부하였으나 부처와 파렐의 강권하는 요청으로 만 3년 만에 제네바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6. 칼빈의  2차 제네바 종교개혁

(1541-1564)





1) 칼빈은 154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지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박해를 받고 도망 온 피난민들을 위해 목회하고, 신학생들을 훈련시키고,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당시 유럽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개혁자가 되었습니다.



2) 제네바가 개혁교회의 뿌리가 되기까지 1541년부터 1555년까지 14년의 긴 세월 동안 칼빈은 많은 고난과 수고를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칼빈을 거부하는 극심한 반대세력과 싸우면서 많은 난관을 뚫고 칼빈은 “교회법령”을 제정하여 예배의식과 교회 제반관습을 개혁하였고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로 구성된 “콘시스토리(consistory)"를 만들어 도덕을 바로 세우고 신학적 논쟁을 통해 올바른 신학사상을 정립하였습니다.

  


또한 ”제네바 아카데미“를 운영하여 교육을 개혁하고 ”종합구빈원“과 ”프랑스기금“ 을 통해 사회복지를 이루어 제네바를 성시화 하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칼빈의 영향으로 전 유럽에 퍼진 종교개혁의 불길


3) 칼빈에게 배운 존 녹스(John Knox)는 스코틀랜드를 장로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또 많은 영국인들이 칼빈의 영향을 받고 청교도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네덜란드 지도자들도 칼빈의 영향을 받고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 독립을 이끌어 냈고, 개신교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헝가리에도 장로교회가 전해졌고, 독일에도 칼빈사상이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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